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단 편집) === 군인과 노동자들의 희생 ===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이 도약할 수 있었던 사건이지만, 눈부신 성장에 가려진 어두운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군인과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가 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불리한 상황,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현실을 생각하며 묵묵히 그들의 일을 했고,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부적절한 대우는 '한국계 회사'에서 많이 나타났다. 외국계 회사에 취직한 사람들은 조건이 괜찮았던 반면, 당시 베트남에 위치한 한국계 회사에서의 노동 모습은 당시 한국의 노동과 비슷한 양상을 가져갔다. 장비는 24시간 운용됐고, 1일 12시간 맞교대로 일을 했으며 휴일은 없었다. 신문에서는 높은 임금을 홍보했지만, 이는 모두 외국계 회사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외국계 회사와 한국계 회사의 임금 차이는 컸다. 특히 초과근무수당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한진]]'은 초과근무수당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베트남 진출 회사 중 300달러라는 가장 낮은 임금을 지급했다. 외국계 회사인 PA&E의 임금은 868달러인 것과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근무 환경 또한 열악했다. 기술자 파월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즈음에는 건물이 없어서 군용처막에서 생활했으며 시간이 흐르자, 목조 막사에서 생활하게 됐다. > 68년 1월 15일부로 제대 명령이 났어요. 그래서 제대해가지고 근무를 하는데 참 분위기 험악해요. 전장이니까 민간인이라도 철모를 쓰고, 방탄조끼를 입고, M1 소총을 옆에다 놓고, 실탄을 240발 옆에다 놓고 이렇게 운전해요. … 운송 중에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죽기도 하고 별짓 다하더라고. … 민간인이라도 … 완전히 군인이요(문정환 구술). 한진의 경우, 미군 측의 군수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이는 북베트남의 우선적인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고,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하나의 '전장'이기도 했다. 불가피한 기술자들의 희생도 잇따랐다. 1966년에는 사망 3명, 중상 5명이라는 인명피해를 낳았고, 1969년 초까지 16명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 “내가 여기 돈 벌러 왔으니까, 죽지 않으면 돈을 벌 거다. …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생각하고 꾸준히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디고” (문정환 구술) 하지만 근로자들은 열악하고 위험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도 절박한 현실을 생각하며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버텨냈다. 한편, 근로자들은 저항이나 쟁의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한진 측에서는 파월 기술자들을 선발한 후 해외개발공사에서 주관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실시하는 소양 교육을 받게 했다. 이는 정부와 한진 측이 함께 베트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저항과 쟁의를 봉쇄하기 위한 교육으로, 노조 운영 금지 / 친목 단체 운영 금지 등을 교육했으며 불만 사항은 귀국 후에 해결해 주겠다고 얘기하며 베트남에서의 불만 야기를 철저히 막았다. 노동계약 또한 불공정하게 이뤄졌다. 근로자들은 출국 전날에 근로계약을 체결하거나 공항에서 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는 당사자가 근로 계약서를 검토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근로 계약서는 예상할 수 있듯이 파월자들에게 불리한 조항들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회사가 기술자들을 마음대로 귀국 조치시킬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로자들은 한진을 상대로 최초 노사분규를 벌였지만, 상황이 개선됨과 함께 노사분규를 주동한 사람들은 해고돼 귀국 조처됐다. 결국 근로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149억 원에 해당하는 임금이 4,000명의 기술자, 근로자들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억눌렸던 감정은 끝내 폭발해 미불임금에 대한 투쟁인 'KAL 빌딩 방화 사건'[* http://demos-archives.or.kr/content/274]에서 드러나게 되며, 노동자들은 정부-자본 결탁에 대해 대항하게 된다. [* 윤충로. (2008). 베트남전쟁 시기 ‘월남재벌’의 형성과 파월(派)기술자의 저항 - 한진그룹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9, 93-128] KAL 빌딩 농성자들 13명은 징역 1~5년을 받았으나 한진 쪽은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베트남 특수로 인해 10대 재벌은 개편됐고, 한진은 1975년대 10대 재벌로써 새롭게 등장했다. 한진의 성장에는 근로자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대우는 적절하지 않았다. 베트남 특수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침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술자들뿐 아니라 군인에 대한 대우도 적절하지 않았다. 파병 군인들의 월급과 전투수당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가장 많이 파병돼 전쟁에 직접적 참여를 한 하사관과 사병들은 38~125달러의 전투 수당을 받았고, 월급 또한 준장이 177달러, 이병이 1달러였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파병 군인을 보냈지만, 타국가(남베트남, 타이, 필리핀)군보다도 낮은 수준의 전투 수당을 받았다.[* 한국의 장군들은 더 많이 받긴 했지만, 대다수였던 사병들은 더 적게 받았다.] 가정에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파병 왔던 군인들은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 상황으로 인해 현지에서 전혀 돈을 쓸 수 없었고, 대다수의 돈을 본국(한국)에 송금해야 했다. 이들은 죽거나 다쳐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전사자들은 1인당 평균 60만 2,300원이 지급됐고 부상자는 1인당 평균 44만원[* 3년 정도의 소득액]이 지급됐다. 전쟁은 군인들에게 반영구적인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남긴다. 군인들은 베트남에서 미군 비행기가 뿌리는 고엽제를 맞았고, [[베트콩]]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아 민간인도 죽일 수밖에 없었고, 아군에게 총기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의 국민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됐고, 실명, 신경 마비, 양팔 절단 등의 장애나 외상후 스트레스 같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으면서 국가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기술자들과 군인들은 나라를 지켰다. 나라는 이들을 지켜줬는가? 미국, 호주, 뉴질랜드의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 제조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받았지만, 고엽제 피해를 입은 한국군들은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부상자들을 위한 '새마을'이라는 자영활농을 할 수 있는 전상자촌을 만들어줬지만, 이들은 신체적 피해로 노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기술자들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저항했으나, 정부와 기업은 같은 마음으로 이들을 제압했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서울: 한겨레출판, 2015), 230-239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